교과서 뿐만이 아니라 번역서 역시 한 집단의 사상을 대변하는데 있어 필요한 부분만 강조되거나 왜곡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축소되거나 삭제될 수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 프린스턴대학 앵거스 디턴(Angus Deaton) 교수의 <The Great Escape>를 번역한 <위대한 탈출>(한국경제신문)을 두고 왜곡 의혹이 나왔다. 출판사 측은 “원문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우리의 잘못”이라며 “의도적으로 왜곡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김공회 연구위원은 지난 18일 자신의 블로그에 <‘위대한 왜곡’?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 번역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성장’과 함께 책의 핵심 테마 중 하나로 제시되는 ‘불평등’이 번역 과정에서 성장의 부산물쯤으로 격하됐다”며 “하나의 독립적인 절로 나뉘어 고유한 논의 주제를 형성하는 의료·보건문제도 부차적인 지위로 강등됐다”고 말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 프린스턴대 교수
김공회 연구위원은 “부제목뿐만 아니라 부(part), 장(chapter), 절(section)의 제목이 대부분 바뀌었고, 절의 경우, 원문의 절 구분을 빼는 동시에 없던 절 제목을 집어넣기도 했다”며 “원문의 내용 중 일부를 자기들 멋대로 생략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리를 옮기기도 했으며, 어떤 경우엔 원문에 없는 것을 집어넣은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고 전했다.
일부 언론은 디턴 교수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자 그가 “불평등이 성장을 촉진한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피케티 대 디턴’ 구도를 설정했다.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는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불평등은 더 악화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 이쯤 되면 ‘소송감’ 아닌가…
김공회 연구위원의 허락을 받아 블로그 내용 일부를 싣는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앵거스 디턴(Angus Deaton)이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그는 국내엔 거의 소개되지 않은 경제학자인데, 그나마 하나 들어와 있는 것이 그의 최근작(2013년) <위대한 탈출>이고, 이 책은 이번 그의 노벨상 수상과는 관계가 (있긴 있지만) 다소 멀다. 이 책은 작년 9월 초에 발간되었는데, 그러니까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이미 한국사회를 휩쓴 뒤이고 또 그것의 한글판이 나오기 바로 직전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위대한 탈출>이 ‘한국경제신문’이라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보수경제지 산하의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경출판사의 책 중에 좋은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디턴의 이 책도 그 중 하나인 셈이다. 그런데… 최근의 좌-우파간의 경제체제 논쟁(증세, 복지, 재벌 등), 특히 피케티를 통해 본격 촉발된 불평등과 증세에 대한 문제제기와 공세가 있자, 그에 대한 ‘대항마’로 이 책 <위대한 탈출>이 선택되었다. 구체적인 번역 경위는 모르지만, 실제로 ‘피케티 vs 디턴’은 이 책의 주요한 마케팅 내지는 셀링 포인트였다.
한경 측의 주장은 이런 거다. 피케티는 불평등이 자본주의의 중요한 모순이며 극소수의 부자들 손에 엄청난 부가 집중되는 것이 그 증거라면서 소득세 누진성을 높이고 그들에게 높은 자본세를 매겨 불평등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기실 불평등이란 성장의 동력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장을 통해 불평등이 줄어드는 경향도 있으므로 그것을 인위적으로 없애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하기 위하여, 디턴의 <위대한 탈출>이 ‘동원’된 셈이다.
당연히 이 책을 진지하게 읽어본 사람들은 분노했다. 왜? 디턴의 이 책은 그런 주장을 담은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디턴은 <위대한 탈출>의 한 대목에서 피케티의 연구(<21세기 자본>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을 때다)를 매우 긍정적으로 인용하면서, 그의 작업이 불평등에 대한 사고방식과 연구방향에 큰 혁신을 가져왔다며 극찬하기도 했다. 서구의 언론에서도 디턴과 피케티를 대비시키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 둘은 ‘보완’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게 옳다.
하여튼 <한국경제신문>, 그리고 이 신문과 함께 자동연상되는 자유경제원 및 관련된 주요 인사들(현진권 원장, 정규재 논설위원 등)은 다양한 기사, 칼럼, 논설 등에서 자신들의 ‘자유주의’ 이념을 설파하는 데 디턴을 ‘인용’하였다. <위대한 탈출>이 ‘피케티 vs 디턴’이라고 씌인 시뻘건 띠지를 두르고 세상에 나타난 것은 물론이다.
자… 여기까지는 나는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역사도 국가가 나서서 왜곡하시겠다고 하는 나라 아닌가? 이 정도는 애교라고 생각했다. 이 책의 원제목에 붙은 ‘health, wealth, and the origins of inequality’라는 구절이 빠진 대신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발시키나’라는 어떻게 보면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구절이 붙은 것을 봤을 때도.. ‘뭐, 저 정도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거다.
한국경제신문이 펴낸 <위대한 탈출>은 단순히 마케팅만 자기들 입맛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은 ‘그들’의 입맛에 맞게…
·부제목뿐만 아니라 부(part), 장(chapter), 절(section)의 제목이 대부분 바뀌었고,
·절의 경우, 원문의 절 구분을 빼는 동시에 없던 절 제목을 집어넣기도 했고,
·원문의 내용 중 일부를 자기들 멋대로 생략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리를 옮기기도 했으며,
·어떤 경우엔 원문에 없는 것을 집어넣은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내가 보기엔 이쯤 되면 거의 ‘소송감’이 아닌가 하는데.. 물론 원출판사 및 저자와 이에 대한 사전협의가 되었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상식적으로 프린스턴대출판부와 노벨상 수상자가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허용했을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생략의 경우엔, 이 책을 원문대조 없이 한글판만 읽으신 분들이 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할 정도다. 이 책의 원문에는 ‘Preface’와 ‘Introduction’이 모두 붙어있는데, 일단 한글판에는 저 ‘Preface’에 해당하는 게 완전히 없다. 이건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그럴지도. 하지만 이 책의 전체 논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Introduction’은 원문의 (놀라지 마시라) 1/3 정도만 번역되었다!
마음이 넓으신 분은, ‘바쁜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핵심만을 전달해주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겠는가’라며 이해하려고 하실 분도 계시겠다. 그렇다면 왜 저들은.. 우리말로 ‘프롤로그’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저 ‘Introduction’의 말미에 난데없이 원문의 ‘Preface’의 중간에 있는 한 구절을 집어넣은 것일까?
한국경제신문 출판사 측은 “본론 내용이 요약된 프롤로그가 길어 독자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요약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프롤로그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왜곡 없이 원문 그대로 실었다”고 했다.
이어 “프롤로그도 내용을 왜곡하려는 의도는 없었고 재판을 인쇄할 때는 프롤로그의 원문 내용을 그대로 싣겠다”며 “부제목도 문제가 된다면 원작의 부제목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출판사 측은 “디턴 교수 측에 유감의 뜻과 현재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 ‘불평등’은 좋은 것?
디턴 교수의 지난 인터뷰들을 보면 그를 ‘불평등 옹호론자’로 보는 시각에 고개를 젓게 된다.
디턴 교수는 지난해 1월 GailFosler Group과 인터뷰에서 “발전이 불평등의 하나의 엔진(progress is an engine of inequality)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불평등은 발전의 ‘결과’ 중 하나일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소득 불평등에 관해 내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그것이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질수 있다는 점이다”고 했다. 또 “최저임금제 인상은 해보다 득이 많다”고 했다.
디턴 교수는 노벨상 수상 직후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도 “불평등은 대단히 복잡한 것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이어 “과도한 불평등은 공공서비스의 붕괴와 민주주의의 후퇴 등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며 “성공(success)은 불평등을 낳지만 그렇다고 성공을 중단시켜서는 안된다”고 했다.
FT는 그의 주장을 “과도한 불평등은 공공서비스의 종말과 민주주의 쇠퇴 등의 부작용을 낳을 수 있지만 동시에 불평등은 예를 들어 성공적인 기업가 정신의 결과 등에 따른 성공의 산물이 될 수도 있다”고 해석했다.
영국 가디언은 “피케티의 베스트셀러인 ‘21세기 자본론’은 디턴과 토니 앳킨슨이 옥스포드 시절 연구했던 미시경제학에 공을 돌리고 있다”며 “이번 디턴의 수상은 피케티, 앳킨슨과 함께 수상했어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디턴 연구는 또다른 노벨상 후보로 부와 소득의 불평등에 초점을 맞췄던 피케티와 앳킨슨의 연구를 보완하고 있다”고 했다.